중시조 한란韓蘭 기준의 40세 손이자 우량의 32세 손이다.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 태생이다. 공은 중년에 청주 방서동方西洞에 이거하였다. 태봉왕 궁예를 이어 태조 왕건이 즉위할 때 그의 공도 있었다고 한다. 태조 2년 10월 배현경이 평양에 축성하는 이점을 의논하니 왕이 한란과 염상에게 영을 내려 현지에 가서 독려케 하였다. 염상이 중도에 병이 나서 강윤형을 대신 보내 평양성을 완성케 하니 태조는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하였다. 그후 청주 방서동에 내려와서 수년 동안 농사를 지으며 무농정務農亭에서 향학을 일으키고 용개평야龍開平野의 농토를 개척하여 부호가 되었다. 태조 11년 왕건이 견훤을 치러갈 때 정벌군의 군량미를 대주고 종군하여 전공을 세웠다. 나중에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삼중대광태위三重大匡太尉’에 녹훈되었다. 시호는 위양威襄이다. 묘는 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에 있고 청주 방서동에 무농정과 방정方井 제단비祭壇碑가 있다. 영동군 난곡리 입구에는 탄생지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중시조 한란의 신도비문神道碑文에 ‘충효덕례忠孝德禮하여 이선기행以善其行하고 근근공검勤謹恭儉하여 이업기가以業其家하라’는 내용이 있다. 청주 한씨에서는 이중 ‘충효덕례 근근공검’을 따서 문중의 종훈宗訓으로 삼고 있다.
양절공파 한확韓確(한란의 13세손) 파조 한확은 세종 때 병조·이조판서를 거쳐 단종 때 우의정을 지내고, 세조 때 좌의정을 지냈다. 1437년(세종 19)에 둘째 딸이 세종의 후궁 소생인 계양군桂陽君과 혼인하였고, 1455년(단종 3)에는 여섯째 딸(인수대비)이 수양대군의 첫째 아들 도원군桃源君(성종의 부친으로 덕종으로 추존됨)과 혼인하였다. 딸이 월산대군과 성종을 낳았다. 그의 사위였던 덕종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20세에 죽었으나 딸이 낳은 아들(월산대군, 성종) 중 성종이 왕위에 올라 그는 왕의 외조부가 됐다. 또 그의 누이 둘이 명明나라에 들어가 큰 누이는 명 세조世祖의 후궁이 됐고(나중에 세조가 죽자 누이는 순장되었다) 작은 누이는 선종宣宗의 후궁이 됐다. 이 인연으로 그는 명에서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의 벼슬을 제수받았다. 명 황실의 외척이라는 위치 때문에 그는 명과의 대외관계에 주요 역할을 맡았다. 특히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했을 때에는 조선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황제의 고명(誥命- 중국 황제가 주는 임명장)을 받아 오기도 했다. 한확은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후에 그를 비롯한 청주 한씨들이 대거 중앙 관직에 진출하는 길을 열었다. 어린 조카를 끌어내리고 왕위에 오른 세조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명나라의 승인을 받는 일이었다. 이에 한확은 1456년 사은謝恩 겸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양위라고 설득하여 명의 승인을 받았다. 귀국 도중 사하포沙河浦(함경도 단천)에서 졸하였다. 누나와 누이동생이 명나라 성조와 선종의 총애를 받음을 계기로 현달했다. 외교와 내치에 공헌하였고 특히 조선 개국 초기 일등외교관의 역할을 하였다.충성공파 한명회韓明澮(14세손) 시조 한란의 13세손 기起의 아들이다. 그의 조부 상질尙質은 고려 말기에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조선 개국 초기에 진문사奏聞使로 명明나라에 들어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정해 받고 돌아온 사람이다. 증조부 수脩는 공민왕 때 대언代言이 되어 신돈辛旽이 집권하자 이를 반대하였으며, 당대의 명필로서 특히 예서와 초서에 뛰어났다. 종조부 상경尙敬은 상질의 동생으로 조선 개국공신이 되어 공조판서·우의정 등을 지내고 영의정에 올라 서원西原 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로써 한씨 문중이 조선조에 충성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가문을 배경으로 출세한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심복으로 단종 1년 ‘계유정난’에서 정난공신 1등에 올라 이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수양의 쿠데타 이후 새 질서 형성에서 한명회를 중심으로 한 한씨 일문이 적극 가담해 10촌 이내의 친척만도 17명이 조정 핵심부에 등장한다. 한명회가 영의정, 한확이 좌의정, 한확의 조카 한치형이 다시 영의정…. 그의 맏딸은 세종의 사위인 윤사로의 며느리가 됐고, 둘째 딸은 그와 함께 정난의 주체 세력이었던 신숙주의 맏며느리였고, 셋째와 넷째 딸은 각각 예종睿宗, 성종成宗의 비가 된다. 또 한명회의 손자 한경심은 성종의 부마가 되었다. 한씨 문중이 그에 힘입어 최고의 번성기를 누렸고 명문세가의 반석 위에 올랐다.
문정공파 한계희韓繼禧(14세손) 할아버지가 개국공신 상경이고 함길도 관찰사 혜惠가 부친이다. 그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세조 때에는 세자(덕종)를 가르쳤다. 성종 때에 좌찬성에 이르렀다. 세종 때 집현전 장서각藏書閣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박람강기博覽强記로 학식을 쌓았다. 학식과 단정한 성품으로 주위로부터 추앙되어 존중히 여김을 받았으며, 특히 서거정徐居正과 교분이 두터웠다. 그는 기내 훈구파의 유학자로서 최항 등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에 참여했고 1447년(성종 8) 「의방유취醫方類聚」의 간행을 주관하였다. 그의 후손 한백겸은 선조조에 「동국지리지」를 저술한 실학의 선구자이다. 9세손 한원진韓元震은 영조 때 심성론心性論 논쟁에서 인간의 성性이 같지 않음을 주장하여 ‘호론湖論’을 대표하였다. 그는 김장생金長生과 송시열宋時烈로 이어지는 이이李珥의 학통을 계승하고, 송시열이 저술하던 ‘주서동이고朱書同異考’를 완성하였다.
충간공파 한리韓理(11세손) 고려 말기 이부상서를 지냈다. 그의 아들 한순승韓承舜의 세 아들 한서룡韓瑞龍, 한서봉韓瑞鳳, 한서구韓瑞龜의 후손들이 번창했는데, 특히 한서룡의 아들 오형제와 그 후손들이 빼어났다. 그중 한서구는 수양대군의 심복으로 계유정난에 공을 세워 정난공신에 오르고 중추원첨지사中樞院僉知事에 이르렀다.
몽계공파 한철충韓哲沖(14세손) 몽계공파는 다른 말로 보안한씨保安韓氏라 부르기도 하는데, 고려 말에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낸 몽계공 한철충韓哲沖을 파조로 한다. 그는 고려가 망하자 “한 몸으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은둔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태조의 부름에도 끝까지 벼슬을 거절하고 산 속에 은거하며 충절을 지켰다. 그의 아버지는 예의판서·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한희적韓希迪이며, 조부는 보문각 직제학을 지낸 한연韓璉이다. 또 그의 아들로 한진韓珍, 한염韓廉, 한겸韓兼, 한문韓文 등이 있는데, 각각 목사牧使와 예조판서, 현감을 지냈다.
관북파 한련韓漣(7세손) 함남 북청, 안변, 함흥 일대에 많이 살고 있어서 안변 한씨로 부르기도 한다. 파조 한련韓漣은 고려 충렬왕 때 예빈윤禮賓尹을 지냈다. 한련의 아들은 찬성사를 지낸 한유韓裕이며, 손자는 고려 말에 밀직부사를 지낸 한경韓卿이다. 한경의 딸은 이성계李成桂의 부인으로 나중에 신의왕후神懿王后에 추봉되었다. 한경은 태조 즉위 후 문하부영사門下府領事를 지내고 안천부원군에 봉해졌기에 후손들이 관북지방을 중심으로 세거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