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성씨와 역사


한국 성씨와 역사

우리나라 성씨의 수


1486년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는 277성으로 되어 있고 영조 때에 이의현이 편찬한 도곡총설에는 298성, 1908년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는 496성(숫자가 많은 것은 고문헌에 있는 사성을 다 넣었기 때문이다)으로 되어있다. 1930년 조사에서는 250성으로 기록되어 있고 1960년 조사에서는 258성이다.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74개의 성씨로 보고되었다. 가장 최근의 조사인 2000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는 286개 성과 4179개의 본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중 귀화 성씨는 442개로 집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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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의 역사 


성姓 : 출생의 계통
성과 씨를 구분없이 사용하고 있지만 성과 씨는 엄연히 다르다. 설문해자를 보면“ 성은 인지소생야(姓, 人之所生也)”라 하듯이, 성은 출생의 계통을 표시하는 것으로 모계시대에는 여계女系의 혈통을, 부계시대에는 남계男系의 혈통을 나타내는 표지이다. 또「좌전左傳」에 “천자건덕 인생이사성(天子建德 因生以賜姓)”이라 한것처럼 천자가 유덕한 사람을 세워 제후를 봉할 때 그 조상의 출생지로써 성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각각 개인의 성에 의하여 각자의 소속된 혈통을 분별할 수 있다.

씨氏 : 우리의 본관(동일 혈통의 지역 분산 표지)
동일한 혈통을 가진 자가 각지에 분산하게 될 때에 각기 분산된 일파를 표시하기 위한 표지가 필요하다. 이것이 씨이다.「 좌전」에서 다시“ 조지토이명지씨(??之土而命之氏)”라 한 바와 같이 씨는 지명에 의하여 명명命名됨을 말하고 있다. 씨란 것은 성에서도 소유한 지역으로써 분별한 것이므로 우리의 본관에 해당한다. 경주김씨, 전주이씨, 밀양박씨 등의 씨자에는 존칭적 의미도 잠재하여 있지만, 본관을 표시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인류 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발전해왔기 때문에 원시 시대부터 씨족에 대한 의식이 매우 뚜렷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씨족은 다른 씨족과 차별되는 각자의 명칭이 있었을 것이며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 성으로 표현되었다.『 환단고기』의 기록에 의하면 배달국 5세 태우의 환웅의 막내아들 태호복희씨가 풍산風山에서 살게 되어 성을 풍風으로 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5700년 전의 일이니 인류 최초의 성이 풍씨다. 풍씨는 이후 15대만에 끊어지고 패, 관, 임,기, 포, 이, 사, 팽이라는 여덟 가지 성을 강姜씨로 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성씨는 강姜씨이다. 성씨 제도는 기실 동이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시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국가의 초기부터 성을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국호를 고구려라 했기 때문에 성을 고씨라 하였으며 충신들에게 극克, 중실仲室, 소실小室 등의 성을 내렸다. 백제는 시조 온조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夫餘씨라고 하였다. 신라에서는 박, 석, 김 삼성의 전설이 전해오며 유리왕 9년(32년)에 육부의 촌장에게 각각 이, 정, 손, 최, 배, 설의 성을 사성賜姓(임금이 성을 내려줌)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 「한서漢書」에 나타나 있는 인명의 기록을 보면, 주몽은 이름만 기록되어 있으나 장수왕 때에는 장수왕의 이름을 고연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하였다. 또 장수왕이 사신으로 보낸 사람들의 이름에도 모두 성을 사용하였다. 백제 역시 처음 왕들은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하다가 「진서」,「송서」 등의 기록에서 근초고왕 때부터 위덕왕 때까지는 여餘씨로 표시하다가 무왕부터 부여夫餘씨로 기록하였다. 신라의 경우도「 북제서」에서 진흥왕을 김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김씨라는 성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 7세기 이전에 기록된 진흥왕의 순수비, 진지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 진평왕 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신성비 등의 비문에서 인명에 성을 사용하지 않고 소속부명(村名)과 이름만 사용하였다. 이상으로 볼 때 삼국의 초기에 우리 선조들은 성보다 본(촌명)을 먼저 썼다고 볼 수 있다. 본격적으로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는 장수왕 시대부터 백제는 근초고왕 시대부터 신라는 진흥왕 시대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성을 사용한 사람들은 왕실, 귀족, 사신들, 유학자, 무역을 하는 사람들에 국한되어 있었고 일반 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 않았다.

 

고려 시대
고려의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 현 개편작업과 함께 성을 하사하면서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으나, 고려 문종 9년(1055)에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는 법령을 내린 것을 보면 이때까지도 성을 쓰지않은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법령으로 우리나라의 성이 보편화되어 일반 민중이 성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아졌다.

 

사성賜姓
우리나라에는 성을 바꾸지 않는다는 성불변의 원칙이 있으나 임금이 성을 내리는 경우에는 제약을 받지 않았다. 그 경우는다음 세 가지인데

우리 식의 한자 성이 없어서 임금이 새로 성을 지어서 내림
-신라 유리왕이 6부의 촌장에게 각각 이 최 손 배 정 설의 성을내림
-조선 태조가 여진인 퉁두란에게 이씨 성을 내림
-조선 선조가 일본인 사아에게 김씨 성을 내림

이미 우리식의 한자 성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임금이 다른 성을지어서 내림
-신하의 특별한 공을 생각하여 사성하는 경우: 고려 태조가 김행에게 권씨 성을 내림
-임금의 이름자를 피하기 위해 사성하는 경우: 고려 현종이 순응에게 손씨 성을 내림

중국의 임금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성을 내림
고려 문종 때 송나라 임금이 전임간에게 문씨 성을 내림


 

조선시대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까지도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수가 없었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노비를 비롯한 천민층이 전체 국민의 대략 40%를 차지하였으니 성이 없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 조선중기 이후부터는 신분 해방과 상승으로 성이 없는 천민들 중에서 일부가 족보를 만들고 성씨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1894년 갑오경장을 계기로 종래의 신분 계급이 타파된 것은 성의 일반화를 촉진시켰다. 양반 상민의 신분 격차가 없어지자 너나 없이 양반임을 주장하게 되고 매관매직은 물론 족보까지 사고 파는 행위도 성행하게 된다.

 

일제시대
일제는 모든 사람이 성씨를 갖도록 하는 민적법民籍法을 1909년에 시행했다. 민적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다. 이때를 기회로 성이 없던 사람에게 본인의 희망에 따라 호적을 담당한 동 서기書記나 경찰이 마음대로 성을 지어주기도 하고, 머슴의 경우 자기 주인의 성과 본관을 따르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집안의 성씨를 모방하여 성을 정하였다. 이때부터 성씨의 종류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우리나라 성씨 사상 최대의 수난기는 일제 말기의 이른바 창씨개명創氏改名이라 하겠다. 일본인식 창씨는 1939년 말부터 실시되었다가 일제가 패망한 뒤 1945년 9월부터 미군정이 개시되면서 1946년 10월 23일 법령 제122호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이 공포되면서 그 시작부터 무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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