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換’, 사내대장부가 집을 나서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이 글은 윤봉길 의사가 23세에 독립운동을 위해 집을 떠나면서 남긴 글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매헌 윤봉길 의사의 성씨이기도 한 ‘파평 윤씨’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여덟 번째로 큰 성씨는 윤尹씨입니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약 102만 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민閔씨·조趙씨와 함께 왕비를 많이 낸 가문으로도 꼽히는 성씨가 윤씨인데, 무려 여섯 명의 왕비를 배출하였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윤씨는 파평·해남·칠원 윤씨를 비롯해서 20여 본이 전해지는데, 계통은 조금씩 다릅니다.
이 중 해남海南, 칠원漆原, 해평海平, 무송茂松 윤씨를 제외한 모든 본관은 파평 윤씨에서 분관됐다고 합니다.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면을 관향으로 하는 ‘칠원 윤씨’는 윤씨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성씨이며, ‘무송 윤씨’는 중국 당나라에서 귀화한 성씨입니다.
조선 시대에 서울시장을 ‘한성판윤漢城判尹’이라 하고, 지방 관청인 부의 우두머리를 ‘부윤府尹’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종종 벼슬 이름에 윤尹 자가 붙는데 이로 인해 윤씨는 관직명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윤씨 중에서 가장 큰 본관은 파평 윤씨입니다. 그렇다면 파평 윤씨는 어떤 성씨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파평 윤씨는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입니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약 77만 명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데, 전체 윤씨에서 75.5%를 점유할 정도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파평 윤씨 족보에 따르면 시조로부터 5세손 윤관까지 전부 단계, 즉 독자로 내려옵니다. 윤관은 아들 7형제를 두었는데, 이후 후대에서 수십 개의 계파로 나뉘게 됩니다.
남원 윤씨와 함안 윤씨는 파평 윤씨로 환보했기 때문에 남원파와 함안파를 포함해서 주요 계파는 크게 14개 파로 나눠집니다. 이 중 판도공파와 소정공파의 세력이 가장 큽니다. 또한 종종 사극에 등장하여 정치적 갈등을 벌이는 윤임과 윤원형은 대윤과 소윤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같은 일가인 정정공파貞靖公派입니다.
집성촌으로는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봉평리 연봉 마을과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녹산 마을, 울산광역시 북구 화봉동 사청 마을과 남원시 보절면 괴양리 신촌 마을을 비롯해서 전국에 크고 작은 집성촌이 흩어져 있습니다.
특히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에는 파평 윤씨가 많이 살고 있는데 병사리에는 파평 윤씨의 재실과 묘역, 문중 서당인 종학당宗學堂이 있고 교촌리에는 소론의 영수인 ‘윤증尹拯’의 고택이 있습니다.
파평 윤씨의 시조는 태사공太師公 윤신달尹莘達입니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궁궐 근처에 있는 신흥사新興寺를 중수할 때 이곳에 공신당功臣堂을 세우게 되는데 이 공신당의 동쪽과 서쪽 벽에 개국공신들의 초상화를 붙여 두게 합니다. 이 공신들을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라고 하는데 윤신달은 여기에 오른 인물입니다.
파평 윤씨의 시조 태사공 윤신달에게 가야나 신라만큼 신비한 탄생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이처럼 시조 윤신달은 잉어와 신비한 인연이 있습니다. 그런데 윤신달의 현손인 윤관 장군에게도 잉어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윤관이 함흥 선덕진 광포에서 거란군에 포위되자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강가에 이르렀을 때 잉어 떼가 길을 인도하여 무사히 강을 건너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같은 인연으로 파평 윤씨는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객관적인 근거는 없지만, 윤신달이 신라 왕족의 후손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탄생한 용연을 비롯해서 그 일대에는 왕을 상징하는 용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고 합니다.
왕족이지만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어 신분을 밝힐 수 없었기 때문에 신비로운 탄생 이야기로 후세에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윤신달이 고려 건국 후 경주에 부임해 30년 동안 떠나지 않고 대도독大都督으로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신라 왕족의 후손이기에 경주의 민심을 달래는 적임자이기 때문입니다.
고려 중기의 인물로 윤관尹瓘 장군이 있습니다.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는 시조 윤신달의 5세손이며 또한 중시조입니다. 시조로부터 윤관까지 모두 독자이기 때문에 파평 윤씨는 모두 윤관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왕의 신임을 받게 되는데, 이때 북방은 여진족이 발흥하여 소란스러울 때였습니다.
고려는 여진을 제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내는데, 1104년 윤관도 여진 정벌에 나섰지만 실패했습니다. 보병 중심인 고려군이 기마 부대가 주축인 여진을 상대했기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보완하여 별무반을 양성할 것을 숙종에게 건의하였습니다. 별무반은 여진 정벌을 위한 특수부대로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으로 각각 편성되었습니다. 3년 뒤인 1107년(예종 2년), 별무반을 주력으로 하는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면으로 출전한 윤관은 여진족을 평정하고 그 지역에 9성을 쌓는 성과를 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터전을 빼앗긴 여진의 저항과 정벌을 반대한 정적들의 요구 때문에 동북 9성은 1109년 반환되었습니다. 이 일로 관직에서 물러난 윤관은 더 이상 정계에 나가지 않고 1111년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 의사가 있습니다.
1932년 그가 일으킨 훙커우虹口 의거는 전 세계에 우리의 독립 의지를 알린 쾌거였으며, 중국인들의 억눌린 가슴에도 불을 지른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이 의거로 한국과 중국이 반일 연합 전선을 형성할 수 있는 중대 계기가 되었고, 임시정부 또한 침체기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윤봉길은 1918년 11살 때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배격하며 자퇴했습니다. 이후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이때 스승으로부터 받은 호가 매헌梅軒입니다. 19세부터는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 계몽 운동을 시작하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일제의 만행과 실력 양성 운동에 한계를 느껴 의열 투쟁과 무장 독립 투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1929년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이 기폭제가 되어 윤봉길 의사는 독립운동의 방향을 전환하고, 다음 해 23세에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換’이라는 글을 남기고 혈혈단신 중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상하이에서 김구 선생을 만나 자신의 뜻을 전한 그는 한인애국단에 입단한 뒤 거사를 준비했습니다.
1932년 4월 29일, 일왕 생일 기념식과 전승 축하 기념식이 열리는 훙커우 공원에는 일본군 수뇌부를 비롯한 인파가 가득했는데 윤봉길 의사가 던진 수통 폭탄은 단상 위에서 정확히 폭발하여 아수라장이 되었고, 이 의거로 일본군 시라카와 대장을 비롯한 2명이 사망하고 3명은 중상을 입게 됩니다. 충격에 빠진 일본군은 확전을 단념하고 긴급히 정전협정을 체결했으며,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주석은 “100만 중국군이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격찬했습니다.
우리에게 ‘서시序詩’로 잘 알려진 윤동주尹東柱가 있습니다. 그는 맑고 깨끗한 여린 모습을 갖고 있지만 누구보다도 우리 민족을 사랑했고 독립을 간절히 원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북간도 민족 교육의 거점인 명동촌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1935년,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거쳐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 생활을 하는데 이때 독립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광복 6개월을 앞둔 1945년 2월,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28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게 됩니다.
2010년에 공개된 재판 관련 문서를 보면 시詩에 나타난 그의 모습과는 달리 일제 재판관 앞에서도 당당하게 독립에 대한 열망과 대책을 열정적으로 주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제의 강압과 회유책에 문인들이 절필하고 변절자로 돌아설 때 그는 특유의 감수성과 독립에 대한 소망이 서려 있는 시를 남겨, 후세에 민족시인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윤씨 중에서 가장 큰 성씨인 파평 윤씨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한국 성씨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시간, <한국의 성씨> 많은 시청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