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신 임유후의 삶과 업적
조선 중기 명신 임유후는 **도승지와 병조판서를 역임한 인물**입니다. 1626년 인조 4년에 정시문과에 급제했으나, 2년 뒤 동생 임지후와 숙부 임정 등이 광해군 복위 음모로 죽임을 당하자 관직을 사직하고 해남에 은거했습니다. 문장이 뛰어나고 행실이 돈독했던 임유후는 **22년간 울진에 머물며 사인들과 교유하고 이 지역의 문풍을 크게 일으켰습니다.** 이후 효종이 즉위하면서 조정에 천거되어 1653년 다시 벼슬길에 나아갔습니다. 임유후는 타고난 자질이 명철하여 사람들에게 훌륭한 관료라는 칭찬을 받았으며, **북방 변경 지역인 성주 목사를 역임할 때는 여진족에 대한 방비를 철저히 하고 백성들에게 유학을 가르쳤습니다.** 부사로 재직할 때는 재난에 처한 백성들을 잘 구휼하여 청백리에 녹는 등 부임하는 곳마다 칭송을 얻었습니다. 그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경주 윤으로 나가 **73세의 일기로 임지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저서로는 '만휴당 휴', '야담' 등이 있으며, 장편 가사인 '목동가'를 지었습니다. 시호는 정희입니다.
울진과의 인연: 김시습과 임유후
임유후는 울진의 서원에 모셔져 있는데, 이 서원에는 **매월당 김시습과 영남 지역의 선비였던 도일도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김시습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후 전국을 떠돌며 방랑생활을 할 때 울진에 들러 유학을 가르쳤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임유후는 **20년 이상 울진에 머무르며 학문을 가르치고 제자들을 양성하여 동 변방 울진 유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